[業자병법] 잘 나가는 VC들이 말하는 2017 정유년 투자 전망

국내에서 벤처캐피털(VC)이 등장한 것은 지난 1980년대 중반이다. 1986년 ‘중소기업창업지원법’이 제정되며 ‘창업투자자’라 불리는 VC 기관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한국기업개발금융’(현 IBK캐피탈)과 ‘국민기술금융’(현 KB인베스트먼트) 등이 업계 선발주자였다. 이후 1997년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벤처특별법) 제정과 함께 ‘벤처붐’이 일면서 ‘창업 지원군’으로서의 VC의 역할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 30년간 투자에 목마른 초기기업들의 갈증을 풀어주며 창업 생태계 활성화에 일조해온 VC들. 이들이 바라보는 2017년 국내 벤처투자 현황과 트렌드는 어떠할까. 최근 서울 논현동에서 열린 ‘제1차 코리아스타트업포럼’에 토론자로 참석한 한킴 ‘알토스벤처스’ 대표,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 이범석 ‘파트너스인베스트먼트’ 상무는 “투자 심리가 얼어붙으며 시장이 보수화된 상황이지만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특정 인기 분야만 좇지 말고 3~4년 뒤 미래 먹거리를 찾을 줄 아는 스타트업을 키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세계 경기 침체와 국내외 정치 리스크 등 연이은 악재로 벤처투자 생태계가 열악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투자 불씨’까지 꺼진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나왔다.


(지난 1일 서울 논현동에서 열린 ‘제1차 코리아스타트업포럼’에 참가한 패널들이 ‘2016 투자 현황 및 2017 투자 트렌드’를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자료제공=코리아스타트업포럼])

사회자(장호영 ‘쿨리지코너인베스트먼트’ 심사역)= 2015년엔 국내 VC 연간 투자 규모가 2조원을 넘기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면 올해엔 그 상승세가 조금 꺾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패널들의 올해 투자는 어땠나.

 

한킴= 우리는 미국에서 활동하다 2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 기업에 투자하고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규모로 투자를 해왔다. 올해 총 8개 기업에 약 300억 정도 새로 투자했고, 기존에 투자했던 회사에 추가 투자한 것도 300억이 넘는다. 2015년보다 오히려 더 많이 한 것 같다.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는 2014년에 580억, 2015년에 400억, 올해는 500억 정도 투자했다. 투자액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적지 않게 한 편이다. 

 

이범석= 올 한해 많은 딜(거래)이 있었다. 가장 금액이 컸던 곳은 ‘야놀자’인데, 지난해 100억을 투자했고 일 년이 채 안 돼 추가로 100억을 투자했다. 한국에선 VC가 이 정도로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게 쉽지 않다. 굉장히 이례적인 케이스다. 



장호영= 주로 어떤 분야에 투자하나. 기억에 남는 업체가 있다면 설명해달라.

 

한킴= 알토스벤처스는 그동안 인터넷 서비스 분야에 많이 투자했었는데, 요즘엔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조금씩 두고 있다. 한번 투자할 때 20~40억 정도 하고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투자한 뒤에도 많이 도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올해 첫 투자처는 ‘지그재그’라는 여성 쇼핑몰 모음 앱이다. 사실 나는 앱이 너무 별로인 것 같아서 망설였었는데, 같이 일하는 심사역이 앱 리뷰를 읽어보라고 하더라. 리뷰를 보니 ‘이 앱 때문에 잠도 못 잔다’, ‘이 앱 때문에 돈 너무 많이 썼다’, ‘지웠다가 못 참고 다시 설치했다’는 리뷰들이 굉장히 많더라. 이 정도 ‘로열 유저’들이 많은 회사라면 투자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0억 투자했는데 벌써 연매출이 천억원대로 나온다. 

 

문규학= 우리는 올해 투자 포커스를 바꿔보려고 했다. 한국의 벤처 생태계가 발전하려면 무엇을 더 채워나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백 투 더 베이직’(back to the basic∙기본으로 돌아가자)의 결론을 내렸다. 벤처라고 하면 기술력이 핵심이니까 기술기업에 주목하려고 했다.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트루밸런스’란 앱이다. (트루밸런스는 선불 스마트폰의 잔액을 간편하게 조회할 수 있는 앱이다) 여기는 직원이 모두 한국인인데 앱은 인도에서 출시했다. 처음 출시할 때엔 사용자를 100만명 정도로 기대하고 투자했는데, 출시 9개월 만에 3,000만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이런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이 스타트업에게 정말 중요하다고 본다.

 

장호영= 각 VC의 투자철학이 궁금하다. 

 

문규학= VC들의 철학은 다 비슷할 것 같다. 나는 투자 실패의 경험을 차곡차곡 모아서 그걸 바탕으로 투자한다. '이렇게 하면 안 되더라'라는 식의 경험을 쌓는 거다. 그리고 마음과 연이 닿는 곳에 돈을 투자한 다음엔 그들이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이 잘 돼야 우리도 잘 되는 거니까. 

 

그리고 우리가 투자하지 않은 기업들도 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벤처생태계 전체가 잘 되기 위해서는 우리와 상관 없는 업체들도 성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투자자의 마음이다.

 

한킴= 따로 투자철학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다만 회사 내부적으로 주로 고려하는 부분들을 따져보자면 사용자 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서비스를 사용하는 고객들이 얼마나 빨리 늘어나는지 보는 거다. 일부러 돈을 집행해 늘어나는 게 있고 자연적으로 늘어나는 게 있는데, 돈을 안 쓰고 늘어나는 것은 소비자들이 정말 그 서비스를 사랑해서 그런 것 아니겠나. 돈을 따로 써서 사용자를 늘리는 경우에는 얼마나 효율적으로 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투자금액이 굉장히 많이 필요할 것 같은 상황이면 조금 주저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당장 수익을 내진 못 하더라도 1~2년 정도 버틸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 땐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투자를 하기도 한다. 어쨌든 다들 똑똑한 사람들이니까 잘 할 거란 기대를 하는 거다.

 

이범석= 나는 투자를 결혼 상대를 찾는 과정에 비유하고 싶다. 결혼할 때도 배경을 보지 않나. 그것처럼 투자자도 창업자의 배경을 보고, 오랜 시간 지켜본 뒤에도 마음에 들면 소위 ‘구애 활동’을 하는 거다. 투자자로서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은 다 주고 때론 읍소도 하면서 투자를 결정하는 것 같다. 오래갈 수 있는 사람인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제1차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의 사회를 맡은 김문수 ‘비네이티브’ 대표가 개회인사를 하고 있다.)

장호영= 내년의 투자 전망은 어떤가.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해 제언해줄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한킴= 올해보다 적게 투자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한 해에 투자할 수 있는 건수는 정해져 있다. 우리는 10개 이상은 힘들다. 좋은 회사처럼 보이고, 진짜 열심히 잘 하려고 하는 곳이라면 투자할 생각이다.

 

나는 사실 스타트업이 망하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망하는 게 당연한 거니까. 확률적으로 투자를 하면 그중 절반 이상은 망하는 게 맞다. 스타트업이라고 하는게 결국 아주 작은 확률에 기대를 갖고 무엇이든 만들어 나가는, 약간은 무모한 도전 같은 것 아닌가. 투자자는 그 작은 확률이 성공하면 굉장한 보상을 받아가는 사람인 거고. 

 

창업가들도 안되는 것, 망하는 것에 대해 ‘내가 바보 같아서 그랬다’고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회사가 망하면 망하는 거고, 그다음에 또 도전하면 되는 거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문규학= 그동안 우리가 마음속에 갖고 있던 약간의 허상, ‘뭐든지 열심히 하면 잘 될 거야’라는 허상이 올해 깨진 것 같다. 하지만 스타트업 생태계라고 하는 거대한 강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가고 있다. ‘혁신’이니 ‘미래 먹거리’니 ‘창조경제’니 표현은 다양하지만 결국 다 스타트업 생태계를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내년에도 이 강은 계속 흘러갈 거라고 본다.

 

다만 어떤 한 ‘테마’만을 좇는 VC는 백전백패할 것이라고 본다. 언론에서 ‘올해는 이 분야가 뜬다’고 떠들 때 그 영역에 투자하면 망하는 것과 똑같다. 스타트업을 하는 사람들은 몇 년을 앞서갈줄 알아야 한다. 3~5년 뒤를 보는거다. 그래서 스타트업이 어렵고 VC 투자도 어려운 거다. 인기 테마만 찾지 말고 벤처 생태계의 질적인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상황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스타트업 하겠다고 뛰어든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줄 수 있어야 한다.

 

이범석= 내년 경기 전망이 안 좋다고 하지만, 결국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내년이 아니라 2~3년 뒤를 보고 하는거다. 경기가 안 좋다고 무조건 투자를 안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금융위기 때 투자했던 딜(계약)들이 가장 수익률이 높았다. 

 

개인적으로는 ‘이커머스’(전자상거래)에 관심이 많다. 어쨌든 국민 소득도 2만 달러가 넘었고 소비자들도 소비다양성에 대한 니즈가 있으니까. 내년에도 이커머스 분야 업체들을 많이 찾아볼 것 같다.

 




한킴= 지금의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는 성공의 ‘J자 커브’ 중 가장 하단에 있다고 본다. 아직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다. 급할 것 없다.

 

문규학= 스타트업 하는 사람들은 항상 우상향으로 성공의 곡선을 그리기만을 바라지만,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잘 가다가도 멈칫하거나 아래로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정신 차리면 또 올라가고 하는 거다. 개인적으론 지금부턴 어떤 마음을 갖는가가 중요한 것 같다. 잠깐 떨어지더라도 자유낙하하지 않고 적당히 안착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 게 올해의 남은 숙제라고 본다. 

 

이날 열린 ‘2016 투자 현황 및 2017 투자 트렌드’ 패널토론은 장호영 ‘쿨리지코너인베스트먼트’ 심사역의 사회로 진행됐다. 한킴 대표가 이끄는 알토스벤처스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기반을 둔 VC로, 소셜커머스 업체 ‘쿠팡’과 음식배달 애플리케이션(앱) ‘배달의민족’을 서비스하는 ‘우아한형제들’을 발굴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직방’, ‘잡플래닛’, ‘토스’(비바리퍼블리카) 등 각 분야의 선두주자들에 투자해왔다. 문규학 대표의 소프트뱅크벤처스는 빅데이터를 분석해 맛집을 추천하는 ‘망고플레이트’, 커플 메신저 앱 ‘비트윈’(브이씨엔씨), 사무용 부동산정보 서비스 ‘알스퀘어’(부동산다이렉트) 등에 투자해온 일본계 VC다. 이범석 상무가 소속된 파트너스인베스트먼트는 지난해 모텔예약 앱 ‘야놀자’에 100억원, 뷰티 앱 ‘언니의파우치’(라이클)에 14억원을 투자한 바 있다. 

 

/기사∙인포그래픽= 비즈업 조가연 기자 gyjo@bzu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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